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여름방학이 끝나가도록 페이는 책가방 속 카세트테이프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방학 동안 기억에 남는 하루를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오라는 과제가 있었는데 말이다. 그 대신 페이가 여름 내내 몰두했던 건, 여타 숙제를 잘하면 생일 선물을 사주겠다는 엄마의 말, 아직 실행되고 있지 않은 그 약속이다. 엄마의 잔소리와 아이의 투정이 오가며 냉랭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 개학 전날, 그제야 페이는 카세트테이프를 들고 뒤늦게나마 과제를 해보려 한다. 〈사이드 A: 여름날〉은 녹음, 삭제, 그 위에 다시 녹음하기라는 카세트테이프의 기본적인 기능을 영리하게 활용해 가족의 초상을 그려나간다. 여기에는 페이의 거짓말, 페이가 취사선택한 이야기, 가공된 가짜 세계가 녹음되겠지만, 만들어진 바로 그 세계야말로 페이가 바라는 가족의 상(像)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인도 콜카타에 머무는 아버지, 대만으로 이주한 엄마와 페이, 인도와 아버지의 흔적, 광둥어보다 낯선 만다린이 공존하고 뒤섞인 그것은 페이가 겪고 있는 세계의 흔적이기도 하다. 페이와 같은 가족사가 있는 감독이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데뷔작이다. (정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