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축 늘어진 엿가락처럼 굽은 등을 하고 터덜터덜 길을 걷는다. 잠시 멈춰 꺼내 무는 담배 연기엔 피곤이 배어 있다. 한입 베어 문 초콜릿이 이 피곤함을 덜어줄 수 있을까? 피곤한 걸음 끝, 성냥갑을 쌓아놓은 듯 좁은 원룸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그곳이 경의 집이다. 째깍째깍 초침 소리에 쫓겨 마감 문턱에서 과제를 하다가 피곤함에 졸다가 꿈을 꾸다가. 침대에 몸을 뉘지만 불안한 듯 흔들리는 눈동자는 감길 줄 모른다.

지금 여기, 대한민국의 20대 여성 경의 24시간은 피로하고 불안하다. 2차원 선으로 그려진 경의 삶은 단조롭고 텅 비어 있다. 텅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재개발을 앞두고 남루하게 헤진 인천 송림동 양키시장 골목. 경의 조부모가 전쟁에 떠밀려 정착한 곳이다. 그곳에서 조부모는 종이 박스로 집을 지어 비를 피했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장사를 하고 버려진 나무 상자를 태워 엿을 고았다. 할머니는 갓난아이를 들쳐 업고 꾸벅꾸벅 졸며 엿가락을 늘였다.

수십 년 전 조부모의 삶과 지금 여기 20대 청년 여성 경의 삶은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가락〉의 애니메이션은 이 둘을 동시적 감정으로 연결한다. 20대 경은 단조로운 2D로, 그 배경은 조부모가 살아온 송림동의 실사로, 조부모의 과거 회상 인터뷰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으로, 각기 다른 질감의 애니메이션이 하나의 연결된 이미지로 경의 삶을 두텁게 사유하게 한다.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