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제목부터 오역이다. الجزائر는 ‘알제리’가 아니라 수도 ‘알제’를 가리키므로 이 영화는 〈알제 전투〉로 번역되어야 한다. 아프리카 북부의 어느 국가에서 일어난 전투에 도시 이름인 알제를 붙이든, 국가 이름인 알제리를 붙이든 그게 대수인가라는 식의 생각이 잠시라도 스쳐갔다면, 이것이 이 전투를 할 수밖에 없었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프랑스인들이 ‘알자자이르’를 자신들이 부르기 편한 방식으로 붙인 이름이 ‘알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식민지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이름을 잃는다는 것’이다. 〈알자자이르 전투〉. 알자자이르라고 해서는 그곳이 어딘지 모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알제리 전투〉라는 제목은 배려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배려가 한편으로는 ‘친절함’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식민주의적 폭력’이 되기도 하는 복잡한 상황이 식민주의가 만들어 낸 역사이기도 하다. 식민주의는 영화의 제목까지도 굴절시키는 것이다.
알제리는 1945년 5월 8일 독일 패망 이후에도 여전히 ‘프랑스 행정 구역’이었다. 영화는 나치에 맞서 싸웠던 레지스탕스가 1954년 알제의 카스바에서 알제리의 레지스탕스 즉 민족해방전선(FLN)를 진압하게 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포착한다. 계속되는 투쟁 속에서 알제리는 1962년에 해방되었다. 이제 식민지배는 정말로 끝이 난 것인가? 알자자이르는 프랑스 이름을 가진 ‘알제리’다. 나라는 되찾았지만, 이름은 여전히 되찾지 못했다. 계단 위로, 계단 아래로 프랑스 군인들이 달려간다. 상향과 하향의 이미지가 반복되고, 동시에 양쪽의 무자비한 폭력이 교차한다. 그리고 이 반복과 교차는 끝없이 되풀이 되는 폭력과 함께 지금도 계속되는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을 떠올리게 만든다. 인간은 패배를 거듭하고 있고, 희망은 말그대로 희박해 보인다. “에이스만 잡으면 싹쓸이! 에이스를 못 쥐면 꽝!”. 야바위꾼 ‘알리 라 쁘앙뜨’가 영화에서 하는 말처럼 에이스만 잡는다면 정말로 싹쓸이일까. 에이스가 사라져도, 아니 오히려 폭음 속에서 사라져 버린 그 자리에서 희망이 시작될 수 있다는 영화의 증언에 귀를 기울여 보자. 에이스는 사라져도 다른 카드가 남아 있다는 것을, 역사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권영민)

1948년 이탈리아 감독 비토리오 데시카의 작품 〈자전거 도둑〉은 당시 사회가 가진 ‘희망’에 대한 희구(喜懼)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이탈리아에 실업과 배고픔이 가득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 절실했던 시기다. 그러나, 희망이 고통을 딛고 넘어가야 하는 과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동시에 그 고통을 외면할 때 주어지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영화는 담고 있다. 대체로 희망은 절망 앞에서 무력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희망과 절망을 교묘하게 교접(交接)시켜 국민과 사회를 통제하려는 의도는 인류가 배태(胚胎)해 온 오래된 습속이다. 실업 앞에 주어진 취직과, 희망찬 미래 앞에 스치는 절망(자전거 도난)은 결국 같은 몸통을 가진 메두사의 머리이며, 동시에 주체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몰약(沒藥)이다. 때문에, 주인공 안토니오 리치가 섣부른 도둑질을 결심할 때조차 그는 아들 브루노에게 차비를 건네며 현장을 벗어나게 하려고 한다. 희망도 절망을 외면해야 하지만, 절망 역시 절망을 외면해야 벗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실패한 절망은 희망에 닿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 절망의 망 안으로 회귀한다. 이 과정에 대중의 환호(축구장)가 함께하고, 도취에서 깨어난 대중은 절망과 포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가 기울고 있는 서쪽으로 몰고 나아간다. 그리고 희망의 손은 아들 브루노가 잡는다. 이 영화에 사용된 촬영 방식은 매우 중립적이다. 카메라는 상황에 개입하지 않으며, 눈높이에서 그리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이 영화에 붙어 다니는 네오리얼리즘이라는 수식어에 걸맞은 방식이다.
그럼, 개입하지 않은 채 현실에서 희망을 희구할 수 있을까? 희망은 그렇게 불편한 것일까? (정주하)

영화를 보는 내내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얽혔다. 하나는 영화 내용을 보며 내가 느끼는 것들에 대한 파편적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서경식 선생님이 만일 살아 계셨다면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을지 추측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감상이 어려웠다. 누군가 내가 존경하는 분의 생각을, 영화를 통해 읽는다는 것을 의식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벽이 될 수밖에 없다.

붉고 건조한 대지 위의 말과 사람들

학창 시절 처음 갔던 뉴욕의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맨홀 뚜껑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보며 미국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에 탄성을 질렀던 기억이 있다. 영화에서 보던 익숙한 장면을 현실에서 발견했을 때의 기시감 같은 것이다. 서경식 선생님은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에서 조지 벨로스의 〈이 클럽의 두 회원〉(1909)을 보고 미국 영화에 대한 비슷한 기시감을 느꼈다고 『나의 미국 인문 기행』(최재혁 옮김, 반비, 2024)에서 서술하고 있다.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고 땀과 피가 튀는 주름상자의 그림 속 세계에서….’ 영화 〈제로니모〉는 보는 내내 내 입에서 모래가 씹히는 느낌을 줄 정도로 붉은 먼지가 화면을 가득 뒤덮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로니모〉는 조금이라도 농담이나 유머가 허용되지 않는 고딕건축 양식을 닮은 서부영화이고, 전형적인 ‘미국 영화’이다. 영화는 늘어선 아파트를 연상시키는 장대한 사막의 붉은 절벽을 배경으로, 일관된 붉은 먼지 속에서 쫓겨나는 사람들과 욕심에 찬 찬탈자들을 그리고 있다. 영화의 스토리는 땅을 포기 못 하는 이들의 대립 속에 몇 안 되는 소수의 선한 중재자들이 이끌어 가고 있다. 극 중에서 소수의 백인과, 통역을 맡은 소수의 원주민 군인이 그들이다. 그들의 역할은 절대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다. 밀려오는 끝없는 백인들에게 대항한 소수 원주민이 저항하는 끝을 우리는 이미 역사책을 통해 알고 있다.

서경식 선생님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펜과 칼』을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에 대한 입문서로서 소개하고 있다. “‘파멸을 향해 갈 운명임을 알고 있’다면서도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거의 승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진실을 말하겠다는 의지’에 대해 이야기한다.”라며 이를 마치 시의 한 구절 같다고 표현했다. (『나의 미국 인문 기행』, 232쪽)
다른 것은 용서해도 땅에 대한 주장 앞에 가차 없는 처단을 하던 제로니모 역 배우 웨스 스투디의 극 중 대사는 영어를 서툴게 하는 원주민의 표현 방식을 들어 마치 짧은 시구와 닮았다.

“이렇게 넓은 땅에,
왜 아파치족을 위한 땅은 없는 거지?
왜 ‘하얀 눈’은 모든 땅을 원하는 거야?”

With all this land,
Why is there no room for the Apache?
Why does the ‘White Eye’ want all the land?

백인 중재자와 인디언 중재자

크룩 장군과 게이트우드, 데이비스, 시버 등은 극 중에서 백인 중재자이다. 이와 동시에 미 기마병대 속에는 스카우트 아파치 군인이 통역사이자 종족의 배반자로 나온다. 이들은 협상을 위해 같이 다녔으며, 제로니모와 함께 전쟁이 끝난 후 모두 유배를 가거나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평화를 추구하는 중재자들의 상징적 운명이다.

2023년 겨울 서경식 선생님의 일본 별장에 모여든 조문객들 사이에 있던 나는 선생님이 마지막 집필한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의 맺음말 글을 받게 되었다. 그 글에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얀마,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에서 전쟁과 학살, 난민이 고통받고 있는 반지성의 극치의 시대에 ‘선한 이들’을 응원하고 인문주의적 사고의 중요성을 끈질기게 이야기해야만 하는 당위성과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무력감 앞에 용기 내 인간의 선한 중재자 역할을 해나가야 한다는 굳은 의지로 그 글은 끝맺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전혀 나아지지 않는 세계 여기저기에서 하루하루 현실에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내 경험의 작은 조각이라도 제시하여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인간 그 자체에 절망하지 않기 위해. 그것이 나의 끝나지 않는 ‘인문 기행’의 한 페이지다.” (『나의 미국 인문 기행』, 261-262쪽)

이 영화는 비록 그들의 역할이 성공적이든 그렇지 못하든 상관없이 선한 중재자들에 대한 서경식 선생님의 바람이 반영된 추천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정연두)

1979년 미국, 게이 커플인 루디와 폴은 루디의 옆집에 사는 소년 마르코를 입양하려 한다. 엄마가 감옥에 간 사이 홀로 남겨진 마르코는 초콜릿 도넛과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다운증후군 소년이다. 두 사람은 마르코의 양육권을 위한 재판을 시작하고, 세상의 편견과 싸움을 벌이지만, “당신들과 다르다고 나쁜 부모가 아냐”라고 외치는 루디의 외침은 허공으로 흩어질 뿐이다.
자신을 감추듯 화려한 화장을 하고 립싱크 무대에만 섰던 루디가 본모습 그대로 자신만의 무대에 서서 밥 딜런의 「아이 셸 비 릴리즈드(I Shall Be Released)」를 열창하는 장면은 마르코를 만나면서 변화한 루디를 보여주는 동시에, 세상의 편견 앞에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영화는 마지막에 루디의 노래하는 모습과 폴이 보낸 편지를 받은 상대편 변호사,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폴을 해고한 상사, 양육권 판결을 내린 판사들을 함께 보여준다. 자녀들이 놀고 있는 집, 법원의 책상과 사무실 복도에서 그들은 미묘한 표정으로 편지와 기사를 읽는다. 누군가의 인생을 뒤바꿀 결정을 내리고도 평안하게 자신들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과 ‘내 빛이 밝아오네’와 ‘얼마 지나지 않아 난 풀려날 거야’를 외치는 루디의 모습이 겹치며 긴 여운을 남긴다.
영화의 원제인 ‘Any Day Now’는 ‘곧, 지금이라도, 얼마 안 있어서’라는 뜻이다. 서경식 선생님이 이 영화를 고른 것은 ‘지금이라도’ 우리가 바뀔 수 있다고, 행동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을까. 좋아하는 인형을 안고 텅 빈 밤거리를 홀로 걸어가던 마르코의 뒷모습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길 바라면서. (정지은)

전후 복구와 고도 경제성장기의 초입이던 1960년대 초반, 일본 빈곤층 가정의 애환을 사회 문제와 결합한 ‘사회파 청춘 영화’의 대표작이다. 주인공은 주물 산업으로 유명한 도시 가와구치(‘큐폴라’는 원형 탑 모양의 용광로를 의미)에서 살고 있는 중학생 준. 준은 해고 노동자인 억압적인 아버지와의 갈등을 비롯해 어려운 가정 형편, 진학 및 친구 관계 등 다양한 문제에 직면하지만 밝고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영화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은 일본인과 재일조선인 사이의 연대 서사이다. 준과 함께 파친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재일조선인 친구 요시에, 그리고 그들의 남동생인 다카유키와 산키치가 가난이라는 현실을 공유하면서 나누는 우정이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묘사되었다. 북한 귀환 사업을 정면으로 다룬 유일한 일본 영화로 기록된 〈큐폴라가 있는 거리〉는 조선인 차별 문제를 휴머니즘적 시선으로 그려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전해주지만, 재일조선인을 단순한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본 재현 방식이 한계로 지적되기도 한다. 공개 후 6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국민 배우 요시나가 사유리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한 작품으로만 자리매김되거나, 각본에 참여한 이마무라 쇼헤이가 프로파간다에 불과했다며 이를 후회했다던 발언이 부각되면서 이데올로기적 잣대로 비판받고 있다. 하지만 혐오 발언이 끊이지 않는 불관용의 시대, ‘느슨한 연대’조차도 귀해진 이 시대에 다양한 생각거리를 던지는 작품이다. “일본 영화사에서 하나의 ‘상처’ 같은 작품”(요모타 이누히코)이라는 평가도 의미심장하다. (최재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