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FF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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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라이브러리] 언어화되지 못할 때, 고통은 심화된다

관객 여러분이 영화뿐만 아니라 폭넓은 문화예술 장르 안에서

‘디아스포라’를 이해하실 수 있도록 '디아스포라' 관련 도서들을 소개해드리는 코너!

 

2023 디아라이브러리

2023 DIA library

 

올해도 '디아스포라'를 다방면으로 연구해오신 ​ 이종찬 평화학 연구자​가 필자로 함께합니다. 

 

어렵기도 하지만, 결코 우리와 멀리 있지 않은 ‘디아스포라’를

보다 쉽고 편안하게, 마치 가까운 지인에게 띄우는 짧은 편지글과 같은 느낌으로 소개해주신 

 

올해의 다섯 번째 추천도서는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하미나 지음, 동아시아, 2021)입니다.


언어화되지 못할 때, 고통은 심화된다


 

진료실 안에서는 고통의 맥락이 삭제됐다. 그곳에서 중요한 건 우울의 원인이 아니라 우울의 증상이었다. (...) 말하자면나는 치료가 필요했으나, 인생을 해석할 권한을 누구에게도 넘기고 싶지 않았다. 정신과에서 듣는 얘기든 심리 상담에서 듣는 얘기든, 이는 판단의 자원으로만 남길 바랐다. (...) 이 글은 죄다 조울증이라는 진단명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스스로 다시 쓰는 이야기이다. 내 권한을 빼앗기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다.”(46~47)

 

그날 정신의학 진료실 안에서 나는 상담사가 나에게 내린 진단에 대해 반박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남들이 잘 알아채지 못하는 수준의 어떤 장애’(disability)가 있는데, 나는 그 사실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끔찍하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런 나에게 상담사는 괜찮다고,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자신의 치부마저도 따스하게 안아주는 마음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선의를 가지고서 나를 위로해 주려는 말이 분명했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나는 상담사의 태도가 묘하게 핵심을 비껴가고 있다 느꼈다. 꽤 적극적으로 나는 상담사의 그 진단을 번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글쎄요. 저는 그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 나의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12회의 상담 동안 내가 상담사의 말을 그와 같은 수준으로 강하게 거슬렀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상담사와의 대화가 나에게 무의미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우울분노라는 두 가지 진단명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그와는 별도로, 유년 시절 내가 겪었던 어떤 결정적인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것 같다고도 진단했다. 그것은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내가 분명하고 강하게 느끼고 있는 어떤 고통의 실체를 나 이외의 존재로부터 객관적으로 확인받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이하미괴오똑 여자들) 의 저자 하미나는 말한다. “진단은 해방인 동시에 억압이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던, 심지어 나조차도 승인하지 않았던 고통을 인정해 준다. 그러나 동시에 나를 멋대로 규정하고 낙인찍는다.”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 여성 우울증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미괴오똑 여자들은 저자가 이삼십 대 여성 30여 명을 직접 만나 인터뷰한 뒤 쓴 책이다. 여기에, 대학에서 과학사를 전공하고 우울증을 연구하며 알게 된 저자의 해박한 지식이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이런 부류의 책을 쓰는 데 있어서 아마도 가장 주의해서 다뤄야 할 섬세한 지점이 있다고 믿는다. 바로 대상화의 위험이다. 인터뷰 과정에서 질문하는 자와 답하는 자 사이에 구조적으로 권력관계가 형성되는 측면이 존재한다. 다만 관건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이냐가 될 텐데 나는 이내 그 의심을 거두어들였다. 무엇보다도 저자에게 인터뷰는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구분에 앞서는) “당사자끼리의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매번 인터뷰에 앞서 그는, 언제나, 자신의 우울증 병력을 털어놓았다고 고백한다. “무엇보다 이들에게 언제나 내 병력을 먼저 털어놓았다.” 나의 시선은 자꾸만 저 언제나라는 부사에 향하게 된다. 이런 태도의 저자가 쓴 글이라면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나였지만, 끝은 그렇지 않았다.” 미괴오똑 여자들은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모두가 공동으로 함께 쓴 책이(기도 하).

 

마찬가지로 하미나의 상호 대화적 태도는 그 자신이 인터뷰이, (질문이 아닌) 답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도 일관되게 작동한다.

 

나는 모범적인 환자는 아니었다. 의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고 진단명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가 내 정체성과 인생을 마음대로 해석하며 침범한다고 느낄 때마다 불쾌했다. 진료실에서는 나뿐만 아니라 의사도 본인의 이야기를 해야만 마음을 열고 속 얘기를 꺼냈다.”(85~86)

 

인천 디아스포라영화제는 매년 객원 프로그래머를 초청하여 그가 추천한 영화를 함께 보고 난 뒤 현장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한다. 지난 5월 열렸던 열한 번째 영화제의 객원 프로그래머가 바로 하미나 씨였다. 같은 시각에 다른 GV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하는 일정과 맞물려 아쉽게도 나는 그 자리에 함께할 수 없었는데, 그가 추천한 영화는 코고나다 감독의 <애프터 양>이었다. 그는 선정의 변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디아스포라는 지금 머무는 이곳에도 떠나온 저곳에도 있지 않은 사람들, 혹은 이곳에도 저곳에도 동시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온전히 속할 곳의 부재를 감각하는 것은 좌절스럽고 외로운 일이기도 하지만 기억과 상상력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방식으로 세상의 일부가 되는가. 코고나다 감독의 영화 <애프터 양>을 보고 돌아온 밤, 영화가 남긴 아름다움과 쓸쓸함에 끙끙 앓았던 것을 기억한다. 이야기는 양의 부재에서 시작된다. 안드로이드 로봇 양은 입양된 딸 미카의 문화적 뿌리를 연결해 주기 위해, 오빠 역할을 해주기 위해 한 가족에게 선택됐다. 양은 어느 날 고장이 나고 아빠인 제이크는 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양이 남긴 기억들을 본다. 인간이건 비인간이건, 이쪽 사람이건 저쪽 사람이건, “그저 존재하면서 어떤 형태든 세상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하미나 씨의 GV 프로그램에 참석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그러나 다른 기회를 통해 만회할 수 있었다. 호텔 조식을 먹는 자리에서 우연히 그와 마주쳐 합석하게 되었다.

 

당시 정신 상담을 받고 있던 중이었던 나는, 그가 미괴오똑 여자들에 썼던 많은 여자들이 우울과 함께 분노를 말했다.”는 대목을 인상 깊게 읽었다고, 나 역시 바로 며칠 전 심리상담 자리에서 우울과 분노를 진단받았다고 그에게 말하려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미괴오똑 여자들은 여성 우울증에 대한 책이었음과 동시에 현재의 우울증 진단 기준으로는 남성의 우울증을 제대로 포착할 수 없다.”고 한 책 속의 문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남성우울증과의 차이와 동일성을 둘러싼 섬세한 결을 두고 함부로 진단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영화제 일정을 마치고 하미나 씨는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또 다른 여행길에 오른다고 했다. 베를린을 경유하여 최종적으로 이집트 다합까지. 전세 계 배낭 여행객들의 성지인 다합에서 그는 프리다이빙에 대한 책을 마무리 지을 것이라 내게 귀띔해 주었는데, 최근 그 책 아무튼, 잠수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프리다이빙은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스쿠버 다이빙과 다르게, 산소통과 같은 공기를 공급하는 장비 없이 무호흡으로 잠수하는 스포츠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한 말이지만, 숨을 참는 능력이 중요하다. 그가 프리다이빙에 몰두하게 된 계기는 어느 시점 이후 더 버틸 수 없겠다고 느낀 때였다고 하는데, ‘버틸 수 없음’(익사)의 고통에서 또 다른 익사의 고통인 프리다이빙을 선택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아이러니함에 대해 그는 자문한다. 왜 굳이 그래야 할까? 왜 굳이 고통과 불편과 두려움을 감수하려 하는가?

 

그런 아이러니함이라면 나 또한 상당 부분 공감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프리다이빙에 매혹된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올해 1월부터 시작한 러닝에 흠뻑 매료되어 있다. 바쁜 일정이 있더라도 1주일에 두세 번 정도는 반드시 달리겠노라 다짐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50분 동안 쉼 없이 논스톱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페이스를 유지하며 달리는 데 성공했다. 도중에 단 한 번도 멈추거나 걷지 않았다.

 

달리는 도중 나도 모르게 조금이라도 무리하게 되면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곤 한다. 호흡은 가빠오고 심장은 터질 것만 같다. 그때가 되면 나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왜 굳이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달려야만 할까? 그럴 때면 나는 다만, 그저 내가 거친 호흡으로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내가 목표로 한 지점에 도달해 있다.

 

<애프터 양>을 디아스포라영화제의 관객들에게 추천하며 그가 썼던 표현(이자 원작 감독의 표현) “그저 존재하면서 어떤 형태의 세상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라는 문장을 곱씹게 된다. 인천에 이어 베를린, 그리고 다합에 이르기까지, 어디에 있든 그는 그저 존재하면서 어떤 형태로든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이가 아닐까. 그는 최근 내가 만났던 가장 근사한 여행자()다고 말할 수 있다.

 

Bon voyage! 멋진 여행을! 지난 5월 디아스포라영화제 일정을 마무리하고 인천공항으로 향하던 하미나 씨에게 내가 마지막으로 건넨 작별 인사였다.

 

 

이종찬

대학(원) 영문과에서 문예비평 및 문화이론을 공부하고, 비판적 문화연구 집단 ‘문화사회연구소’에서 활동했다. 경계의 사유로부터 촉발된 문학과 예술의 사회적 존재론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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