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라이브러리] LET GAZA LIVE, 가자를 살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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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FF MAGAZINE

[디아라이브러리] LET GAZA LIVE, 가자를 살게 하라

관객 여러분이 영화뿐만 아니라 폭넓은 문화예술 장르 안에서

‘디아스포라’를 이해하실 수 있도록 '디아스포라' 관련 도서들을 소개해드리는 코너!

2024 디아라이브러리

2024 DIA library

올해도 '디아스포라'를 다방면으로 연구해오신 이종찬 선생님께서 필자로 함께합니다.

어렵기도 하지만, 결코 우리와 멀리 있지 않은 ‘디아스포라’를

보다 쉽고 편안하게, 마치 가까운 지인에게 띄우는 짧은 편지글과 같은 느낌으로 소개해주신

올해의 세번째 추천도서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가산 카나파니, 열림원, 2002) 입니다.

LET GAZA LIVE, 가자를 살게 하라

지난 5월 17일 12회 인천 디아스포라영화제 개막식이 진행되던 야외무대 현장, 관객석 어디에선가 불시에 구호가 터져 나왔다. “프리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을 자유케 하라. 당시는 이스라엘 군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사실상 마지막 피난처였던 라파 지역 점령을 목전에 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이라는 한국의 시민단체 활동가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 같았다. 그들은 영화제 개막식 행사가 모두 끝난 뒤에도 집으로 돌아가는 관객들 한명 한명에게 자신들이 준비한 유인물을 바삐 나눠주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호소가 적혀 있었다. ‘이스라엘은 라파 지상전 즉각 중단하라! 인종 학살 당장 멈춰라’.

이날 상영되었던 개막작은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다>라는 작품으로 재(在)스위스 팔레스타인인 2세 이반 야그치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영화는 어린 시절부터 감독의 절친이었던 유대인 친구와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유년 시절을 누구보다도 가깝게 보낸 친구와 감독 사이에는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묘한 긴장감이 쌓이기 시작한다. 중요한 계기는 친구의 결혼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친구는 아내와 함께 스위스를 떠나 이스라엘 정착촌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스라엘에서 열린 친구의 결혼식에 감독은 참석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이반 야그치 감독은 영화 속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자신은 아직 선조의 고향인 팔레스타인 땅을 밟아본 적이 없는데 첫 조국 방문을 이런 식으로 할 수는 없었다고. 그는 참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었던 셈이다.

감독은 친구에게 제안한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라는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두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회피하지 말고 둘 사이의 차이에 대해 대화를 나눠보자고, 그리고 그 과정을 영상에 담아보자고. 감독의 제안에 친구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것이 이 영화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다>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반 야그치 감독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마침내 이스라엘/팔레스타인으로 향한다. 하지만 둘 사이의 대화는 처음부터 순조롭게 풀리지를 않는다. 친구는 말한다. 1948년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세워지기 이전까지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폭력적인 발언 속에서, 이스라엘 건국 이전에도 엄연히 그곳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인들의 존재는 너무나도 간단하고 손쉽게 삭제되어 있다.

이스라엘 정착촌의 전기 철조망 너머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과 처음으로 대면하게 된 감독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자문한다. 나의 가까운 이스라엘 친구, 그리고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생면부지의 타인인 저 팔레스타인인들, 둘 중에서 어느 쪽과 나는 더 가까운가. 어느 쪽과의 거리가 더 먼가.

아슬아슬한 줄타기 속에서 결국 친구는 촬영 중단을 선언해버린다. 그리고 어느 한 시절을 누구보다도 가깝게 보냈던 친구와의 인연도 산산조각 나버리고 만다. 영화는 이반 야그치 감독이 한 시절을 어느 누구 이상으로 가깝게 지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헬로’에서 시작하였으나 ‘굿바이’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답신을 기약할 수 없는 독백으로서의 이야기.

<뜨거운 태양 아래서>(테우픽 살레 감독, 1972년)는 올해 영화제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문제를 다룬 또 하나의 작품이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선언 이후 전쟁과 추방을 경험한 세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 남성이 가난과 절망의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줄 일자리를 구하고자 쿠웨이트로 밀입국을 시도한다. 사막의 뜨거운 태양 아래 그들은 자신들을 이동시켜 줄 물탱크 운전사를 고용하여 남몰래 국경을 넘어 가고자 하지만, 그들은 끝내 뜨거운 물탱크 속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팔레스타인 작가 가산 카나파니의 원작 소설 『태양 속의 남자들』(Men in the Sun; 1963)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왜 그들은 물탱크의 측면을 노크하지 않았을까?” 그[트럭 운전사]는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아보았지만 쓰러질 것만 같아, 운전석으로 올라와 핸들에 머리를 기댔다.
“왜 당신들은 물탱크의 측면을 노크하지 않았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도대체 왜?”
사막은 갑자기 메아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왜 당신들은 물탱크의 측면을 노크하지 않았지? 왜 물탱크의 옆구리를 쾅쾅 치지 않았던 거야? 왜? 왜? 왜?” (94~95쪽)

영화는 전체적으로 원작 소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지만 몇 가지 지점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트럭 운전사는 사망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시신 앞에서 왜 살려달라고 물탱크를 치지 않았냐고 절규하지만, 영화 속에서 세 남성은 애타게 물탱크를 두드린 것으로 분명하게 묘사되고 있다. 단지 운전사가 그들의 절규를 듣지 못했을 뿐인 것이다.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어쩌면 그들은 살려달라는 비명조차 지르지도 못한 채 비참하게 죽어나갔던 것이 아닐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외려 이 쪽이 훨씬 더 리얼한 것이 아닐까 상상해보게 된다. 물탱크 속에서 숨진 이들 중 한 명인 사아드는, 죽을지도 모를 만큼 위험하다며 밀입국을 만류하는 아내를 향해 이렇게 반문한 적이 있다. “죽는다고? 이곳을 떠나는 것이 현재 이곳의 삶보다 낫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놈이 도대체 누구야?”(19쪽) 그들에게는 밀입국의 실패야말로 죽음보다 더한 공포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찌 감히 물탱크를 두드릴 수 있었단 말인가. 가산 카나파니의 원작 소설 또한 이같은 나의 해석에 힘을 실어준다. 소설 속에는 세 남성들이 물탱크를 두드렸다는 어떠한 서술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살려달라고 왜 물탱크를 치지 않았느냐는 트럭 운전사의 절규를 있는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독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답을 찾아나갈 필요가 있다. 그 편이 원작가의 진의에 부합할 것이라 나는 믿는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는 지난 12월 18일 급작스럽게 영면한 재일조선인 2세 서경식 선생이 생전에 추천한 영화였다. 원래대로였다면 올해 영화제 때 관객과 함께 영화를 보고 선생으로부터 직접 추천에 대한 변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지만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선생은 이와 관련한 글을 남긴 적이 있다.

선생은 1970년대 말 무렵 일본어로 번역된 카나파니의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작은아버지를 즉각적으로 떠올렸다고 고백한다. 당신의 작은아버지 또한 소설 속 팔레스타인 난민들처럼 밀항자였기 때문이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이전까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조선과 일본 사이의 통로가 닫혀버리자 작은아버지는 작은 어선의 기관실에 숨어 몰래 일본으로 밀항했다. 혹시라도 들킬까 봐 기름이 담긴 드럼통에 목까지 담가 숨었다고 한다. 서경식 선생은 그때의 기억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카나파니의 『태양 속의 남자들』을 읽자, 나는 어렸을 때의 비밀스러운 기억이 갑자기 되살아났다. 탱크로리의 탱크에 숨어들었던, 그리고 어선의 기관실에 숨어들었던, 살기 위해 경계를 넘어서려 했던 팔레스타인 난민과 작은아버지. 그런 작은아버지의 존재가 나에게는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할 때 중요한 좌표축이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둔 사람이고 작은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의 일원이다.”

2023년 12월 8일,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역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에서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와 연대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팔레스타인 국기 모양의 인간 모자이크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행사를 주최한 게르니카 시민들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고 한다. ‘우리는 스페인 내전 당시 가해졌던 게르니카 폭격의 당사자이고 그 파괴의 참혹한 결과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또 다른 게르니카를 원치 않는다.’ 5월 17일 디아스포라영화제 개막식 현장에서 울려 퍼졌던 한국인의 ‘프리 팔레스타인’ 구호를 접하고 나는 12월 18일의 저 게르니카 시민들을 떠올렸다.

LET GAZA LIVE. 가자를 살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