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라이브러리] 자기 자신의 실종을 기획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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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FF MAGAZINE

[디아라이브러리] 자기 자신의 실종을 기획한 작가

관객 여러분이 영화뿐만 아니라 폭넓은 문화예술 장르 안에서

‘디아스포라’를 이해하실 수 있도록 '디아스포라' 관련 도서들을 소개해드리는 코너!

2024 디아라이브러리

2024 DIA library

올해도 '디아스포라'를 다방면으로 연구해오신 이종찬 선생님께서 필자로 함께합니다.

어렵기도 하지만, 결코 우리와 멀리 있지 않은 ‘디아스포라’를

보다 쉽고 편안하게, 마치 가까운 지인에게 띄우는 짧은 편지글과 같은 느낌으로 소개해주신

올해의 네번째 추천도서는

『밀란 쿤데라를 찾아서』 (아리안 슈맹, 뮤진트리, 2022) 입니다.

자기 자신의 실종을 기획한 작가

프라하에 쿤데라를 주제로 한 관광 코스 같은 것은 없다. 그의 책들에서 빠져나온 유령들이 있을 뿐이다. 비밀 경찰국 지역 사무소가 있던 바르톨로메이스카 거리에도, 예전에 작가와 그의 부인 베라가 머물렀던 동네에도 쿤데라의 자취는 전혀 없다. 49개 언어로 번역된 소설가가 1960년대에 강의했던 영화 학교도 이 작가를 기릴 생각을 하지 않은 것 같다. 그의 조국은 그에게 삐쳐 있고, 젊은이들은 그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체코 공화국에서 농담처럼 떠도는 말이 있다. “[바츨라프] 하벨은 감옥에 들어갔기에 대통령이 되었다. 쿤데라는 프랑스로 떠났기에 작가가 되었다.” 이는 괜한 농담이 아니다. 그것은 해소되지 않은 앙심과 지금도 여전한 식은 애정을 증언한다.(152~153쪽)

2023년 7월 11일 파리의 작은 아파트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가 고요히 숨을 거뒀다. 향년 94세의 나이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사람들에게 그다지 무게감 있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무리 보아도 그의 부고 소식은 조용히 묻혔다는 인상이 강한데, 그의 작가적 명성을 생각해보았을 때 이는 의외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물리적 죽음과는 별도로 쿤데라는 그보다 한참 전부터 이미 실종된 삶을 살아왔던 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작가 자신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택한 삶의 방식이었다. 자기 자신의 실종을 기획한 작가, 밀란 쿤데라.

1967년 4월, 쿤데라의 첫 소설 『농담』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출간된다.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가벼운 정치적 농담 하나로 인해 뜻밖의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인물의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은 공산주의 체제의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놀랍게도 아무런 수정 없이 공개되었다. 이에 더해 그 이듬해에는 당의 검열이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한다. 하지만 1968년 8월 20일에서 21일로 넘어가는 밤 사이에 소련군 전차들이 무력으로 수도 프라하를 넘어오면서 ‘프라하의 봄’은 좌절된다.

“스탈린 시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증언”. 『농담』에 대해 언론은 이와 같은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쿤데라가 보기에 이는 자신에 대한 ‘거대한 오해’였을 뿐이다. 언론이 쿤데라를 ‘참여 지식인’으로 예찬하는 데 여념이 없을 때 정작 그는 ‘작가’이기를 원했다. 쿤데라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 적이 있다. “우리가 겪는 곤경을 너무 멜로드라마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53쪽)

“쿤데라 씨, 당신은 공산주의자입니까?─아뇨, 나는 소설가입니다. 당신은 반체제파인가요?─아니오, 나는 소설가입니다. 당신은 좌파입니까, 우파입니까?─어느 쪽도 아닙니다. 나는 소설가입니다.”(128쪽)\

1975년 프랑스 파리로 망명한 쿤데라는 1984년에 자신의 또 하나의 대표작이라 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출간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둔다. 이후 미디어들이 앞 다퉈 그를 차지하려 들자 힘들어하던 쿤데라는 1985년 6월, 마침내 침묵 속에 칩거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다시는 인터뷰를 하지 않겠노라. “공산주의 나라들에서는 경찰이 사생활을 파괴하지만, 민주주의 나라들에서는 기자들이 사생활을 위협한다.”(18쪽)

파리에 있는 작가의 아파트 인터폰 이름표에는 ‘밀란 쿤데라’라는 자신의 실제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소설가 친구 중 어느 누군가의 이름, 또는 그의 작품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아일랜드 번역가의 이름을 위장 표기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숨기고자 했다. 쿤데라 자신이 인터폰을 받게 하려면 벨소리 한번, 두 번과 같이 사전에 약속된 나름의 은밀한 암호를 따라야만 했다고 한다.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영락없는 ‘불법’(이라 쓰고 ‘미등록’이라 읽는) 체류자의 방식이 아닐 수 없다.

확실히 쿤데라는 작품 외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는 극도로 절제하는 태도를 일관되게 내비친 사람이었다. 이와 관련한 개인적인 일화가 하나 있다.

2015년 여름 체코의 오스트라바 미술관(The House of Art)에 방문한 적이 있다. 미술관에는 총 너댓 개의 기획 전시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유독 한 섹션에서만 영어 해설이 되어 있지 않아 난감해 하던 차였다. 그때 마침 관람객으로 같은 전시관에 들어와 있던 한 여성 현지인이 친절하게 다가와 선뜻 도움을 주었다. 원한다면 영어로 설명해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비록 체코어 특유의 강한 억양으로 인해 그의 설명을 온전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타지에서 받게 되는 뜻밖의 친절은 그 자체로 값진 경험인 것이었다. 전시관을 나와 로비에서 서로 가벼운 소개 및 담소를 나누고 난 뒤 그와 헤어지면서 감사함의 표시로 그에게 가방에 들어 있던 책 한 권을 선물했다. 쿤데라의 에세이집 『만남』의 한국어 번역본이었다. 한국에 밀란 쿤데라 문학 전집이 나와 있다는 말을 들려주었더니 그는 무척이나 놀라는 표정이었다.

쿤데라는 세계 전역에 번역 소개되는 자신의 책 편집 과정에서 각국의 해당 출판사와 꼼꼼한 논의를 주고받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한국어 번역본의 앞날개에 적힌 저자 소개는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거기에는 딱 두 개의 짧은 문장만이 프린트되어 있을 뿐이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1975년 프랑스에 정착하였다.” 이것이 저자가 자신의 책에 넣도록 제안한 유일한 저자 소개글이다. 함께 미술관 입구로 나와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기 직전에 그는 내게 말했다. “너무 많은 일들을 겪으면 말수가 적어지는 것인지도 몰라요.”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뿐사뿐 제 갈 길을 가는 것이 아닌가.

자기 노출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쿤데라는 민감한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왜 그토록 강박적이어야만 했을까. 그에 대한 대답이 저 체코 현지인의 말 속에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많은 일들을 겪어서.

1995년에 출간된 소설 『느림』은 쿤데라 문학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원전 자체가 프랑스어로 쓰여진 최초의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코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쓰여진 쿤데라의 연작이 등장하면서부터 그에 대한 문단의 평가가 차가워지기 시작한다. 급기야 쿤데라의 프랑스어 연작들은 이제 프랑스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먼저 출간되기에 이른다. 가령 『향수』는 스페인에서 2000년, 파리에서는 2003년에 공개되었고, 『무의미의 축제』 또한 이탈리아에서 2013년, 프랑스에서 2014년에 모습을 드러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탈출했던 쿤데라의 작품이 이제 파리를 등진다.”(147쪽)

필립 카우프만 감독의 <프라하의 봄>(1988년)이라는 영화가 있다. 쿤데라의 원작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영화화한 작품인데, 다니엘 데이 루이스 그리고 줄리엣 비노쉬 두 배우의 풋풋했던 시절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밀란 쿤데라가 남긴 발자취를 회고하는 의미에서 다음 디아스포라영화제에서 관객들과 함께 이 영화를 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정작 쿤데라 자신은 이 영화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나머지 이후 어떠한 작품의 영화화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종찬

대학(원) 영문과에서 문예비평 및 문화이론을 공부하고, 비판적 문화연구 집단 ‘문화사회연구소’에서 활동했다. 경계의 사유로부터 촉발된 문학과 예술의 사회적 존재론에 관심이 많다.